성적 절제만으로는 부족함
마이크 즈눙
1998년 늦가을이었습니다. 저는 그때 출장 중에 있었으며 호텔 방에서 자위 행위는 하지 않았지만 포르노 영화에 푹 빠져 있었습니다. 자위는 하지 않았지만, 저의 머리 속에는 그것에 대한 상상과 음란하면서 동시에 수치스런 생각이 매우 강하게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자신의 마음이 또 다시 그렇게 더러운 생각에 깊이 빠져든 것에 낙심한 저는 출장에서 돌아온 지 얼마 안되어 제가 속해있는 12단계 그룹의 한 회원과 함께 점심 식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그에게 제 문제를 털어놓았으며, 저를 위로하려고 한 그는 “그래도 행동으로 옮기지는 않았잖아요”라는 말로 답변을 대신했습니다. 사실이지 본 그룹의 “성적 절제”에 대한 정의에 의하면 저는 여전히 “정결한 편”에 속했던 것입니다.
저는 12단계 프로그램의 활동에 참여한지 8년 만에 처음 자신이 그것을 통해 받을 수 있는 도움을 모두 받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한 가지 문제는 12단계 프로그램의 성적 절제에 대한 정의에 있었습니다. 그것은 “결혼한 배우자 외에 다른 사람과 성관계를 갖거나 자위 행위를 하지 않으면 괜찮다”라는 내용으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계속 “진정한 절제는 정욕에 대한 점진적인 승리”라는 희한한 진술로 되어 있습니다. “점진적인 승리”란 말의 이해가 힘들자 사람들은 그 말의 육체적인 면에 강조점을 두었습니다.
본 그룹의 커다란 목표는 모든 사람에게 성적인 절제를 유지시키는 것이었습니다. 1년 이상 성적 절제를 유지한 사람에 대해서는 마치 선각자적인 인물로 대우했으며, 성적 절제를 유지한 사람들로부터 그것에 대한 비결을 듣기 위해 많은 새로운 사람들이 그곳에 몰려왔습니다.
90년대 초 저는 처음 12단계 프로그램에 가입했을 때 굉장한 열정을 갖고 그것을 시작해 18개월 동안 정결한 삶을 잘 유지했습니다. 저는 그때 다른 사람들이 감탄한 소수의 선택된 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습니다.
저는 각종 모임을 인도하고, 사람들을 후원하며 마치 플라톤처럼 자신의 지혜를 전하는 일을 했습니다. 저는 “정욕으로부터의 자유에 대한 대변인(Oracle of Freedom from Lust)”이 되어 있었으며, 적어도 그렇게 생각을 했습니다.
아메리칸 헤리티지 영어 사전은 “절제”를 “알코올이나 약물의 적당한 소비 또는 사용”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비록 제가 1년 반 동안 포르노와 자위 그리고 혼외 성관계를 멀리했지만, 제 안에는 여전히 공허감과 고독감이 떠나지 않은 채 계속 괴롭히고 있었습니다.
그런 가운데 캐나다 출장 중 마침내 이러한 영적 공허감에 여지 없이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폰섹스와 자위 행위로 인해 지난 18개월 동안의 절제 생활이 하루 밤 사이에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던 것입니다. 저는 30일 동안 절제 생활을 하는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상을 받지 못하는 자들과 똑같은 입장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즉시 회복하여 또 다시 3년 동안 절제 생활을 유지했습니다. 저는 3년 동안에 걸쳐 절제 생활을 하면서 마치 우리 그룹 안에 있는 사람들이 내게 절을 해야 한다고 생각할 만큼 자부심을 가졌습니다. 그렇다면 그토록 오랫 동안 절제 생활을 해온 제가 또 다시 어떻게 성적 범죄에 빠질 수 있었을까요?
1995년 우리는 로스앤젤레스에서 콜로라도 스프링스로 이사를 했습니다. 그 동안 위로와 힘이 되어준 그룹과 헤어진 저에게는 공허감이 계속 쌓여 갔습니다. 저는 깊은 수렁에 빠졌으며, 또 다시 포르노와 자위 행위를 가까이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금방 회복하지 못한 채 3년 동안의 세월을 방탕과 부끄러움과 절망의 늪에서 보냈습니다.
저는 성적 절제를 가장 중요한 목표로 생각하는 데서 많은 과실을 범했으며, 다른 사람들 역시 그렇게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저는 포르노에 빠져 있는 사람들 가운데 자신이 자위 행위를 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절제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자들을 많이 보았습니다.
사실은 저도 그러한 사람들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이것은 알코올 중독자가 자기가 위스키 대신 맥주를 마시기 때문에 술을 마시지 않고 있다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장기간에 걸친 “절제”에 대한 자부심은 사람들이 빠지기 쉬운 위험한 구덩이가 됩니다. 저에게도 역시 그러한 경험이 있습니다. 우리의 능력으로 도로에 난 이처럼 큰 틈을 건넌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저는 자신이 “절제력”을 잃지 않을 수 있는 정욕의 정도가 어느 정도인지를 시험하기 위해 종종 가장 위험한 경계선을 걸어가는 듯한 모험을 했습니다.
사실 저는 성적인 죄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노력을 다 하지 않았고 위험한 게임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제가 추구한 절제의 기준은 이 정도로 그것에는 언제든 죄에 빠질 충분한 위험성이 있었습니다.
순결과 절제는 결코 동일한 것이 아닙니다. 아메리칸 헤리티지 사전은 순결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습니다.
1. 다른 것이 섞이지 않은 품질 내지는 상태.
2. 죄 또는 죄책감으로부터의 자유; 무죄함; 정조.
우리는 성적 순결에 대한 기준을 최종적으로 하나님에게서 찾아야 하며, 하나님께서 제시하고 계신 기준은 외적인 조건을 훨씬 초월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순결의 기준에 대해 마태복음 5장 27-28절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계십니다.
“또 간음치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우리는 예수님께서 성적 순결에 대한 하나님의 기준을 말씀하시면서 그것의 개념을 육적인 것에서 영적인 것으로 바꾸어 놓으셨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합니다. 인간은 외적인 것을 강조하는 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마음을 보십니다.
그것은 우리의 모든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적질과 거짓 증거와 훼방이” 나오는 곳이 바로 마음이기 때문입니다(마태복음 15:19).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성적 순결의 기준에는 죄가 들어올 수 있는 틈이 조금도 없습니다.
예수님의 교훈에서 보는 것처럼 우리는 마음 가운데 음욕을 품는 순간 죄를 범하거나 “성적 절제력을 상실하게 됩니다.”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3초 규칙”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저는 사람들로부터 제가 자위 행위를 부정하는 것에 대해 불만스럽게 생각하는 이메일을 종종 받는데, 여기에서 그 가운데 하나의 내용을 소개할까 합니다.
“그것은 절대 불가능하지요. 그것을 어떻게 다 지킬 수 있지요? 우리가 어떻게 자신의 마음을 조금의 티도 없이 정결하게 할 수 있어요?” 만약에 당신이 성적 순결에 대한 하나님의 기준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자신이 지금 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면, 저는 하나님께서도 분명히 그러한 관점에서 그렇게 말씀하셨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음란하고, 정욕적이며 자기 도취에 빠져 있는 마음을 순결한 마음으로 바꾸실 수 있는 분은 당연히 하나님 한 분 밖에 없습니다.
성적 순결에 대한 하나님의 기준에 우리는 순종해야 합니다. 백기(白旗)가 올라갔으며, 우리는 항복을 선언해야 합니다. 싸움이 시작되기도 전에 전쟁이 끝났으며, 우리는 지금 패잔병의 자리에 있습니다. 자신의 능력으로 마음을 정결케 할 수 없는 우리가 하나님의 기준대로 살고자 할 때는 반드시 실패할 수 밖에 없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정욕으로부터 벗어난 삶을 살기 위해서는 자기에게 “그러한 능력이 충분히” 있다고 생각하는 그릇된 견해를 버리고 삶 가운데 하나님만을 열심히 의지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에스겔 36장 26절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 따라서 저는 수 개월 또는 몇 일이라도 “절제하는” 삶을 산 것에 대해 자랑해서는 안됩니다. 오늘날 제가 누리고 있는 죄로부터의 자유는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마음 가운데 있는 정욕으로부터의 자유를 통해 오는 참다운 성적 순결은 절제를 통해 가능한 것이 아닙니다. 이러한 자유는 공허한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의 사랑으로 충만해 질 때 누릴 수 있습니다.
우리가 죄를 범하지 않을지라도 마음이 공허할 때는 마침내 정욕이나 또는 그 밖의 다른 그릇된 것으로 그러한 사랑을 충족시키려 하는 죄를 범하게 됩니다. 따라서 우리가 진정 추구해야 할 것은 정욕보다 훨씬 더 강하고, 위대하며 순결한 것으로 우리의 마음을 채우는 것입니다.
A. W. 토저(A. W. Tozer)는 “하나님을 추구함(In The Pursuit of God)”이란 책에서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영혼을 강하게 하는 것은 단순한 말이 아니라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자는 개인적으로 하나님을 발견하는 체험을 할 때 비로소 진리를 깨닫게 됩니다. 따라서 성경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마음 가운데 모시고 그분의 임재를 느끼게 하며, 자신의 마음 가운데 하나님의 내적인 아름다움을 맛보고 체험하도록 그분에 대해 알기 위해서 필요한 지식에 이르게 하는 수단입니다.”
당신은 “마음 가운데 하나님의 내적인 아름다움을 직접 체험하고 깨달을 때,” 성적 순결에 대한 자신의 능력으로는 불가능한 하나님의 기준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을 공급받게 됩니다.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의 사랑으로 충만하고 그것을 통해 인도받을 때 우리는 정욕과 같은 죄악 되고 그릇된 것을 결코 추구하지 않습니다.
당신은 하나님에 대해 알고 그분을 사랑하는 것을 목표로 삼을 때 성적 순결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절제”를 통해서만은 절대로 목표를 달성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에는 능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성경이 가르치는 핵심적인 교훈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수 있을 정도로 선해지기”가 아니라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빌립보서 3:8-11에서 바울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의로움, 즉 순결한 마음은 우리가 그리스도를 알아 그분을 우리의 삶 가운데 주인으로 모실 때 가능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정욕이나 일, 음식, 인간 관계, 삶의 쾌락 혹은 “절제”에 대한 교만과 같은 다른 우상과 경쟁하려 하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삶의 가장 중요한 자리에 모시기 위해서는 “모든 것을 해로 여긴” 바울처럼 열정적이고, 일관되며 타협하지 않고 전력을 다하는 노력을 해야합니다.
A.W. 토저는 “우리의 영혼을 강하게 하는 것은 단순한 말이 아니라 하나님이십니다... 따라서 성경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마음 가운데 모시고 그분의 임재를 느끼게 하며, 자신의 마음 가운데 하나님의 내적인 아름다움을 맛보고 체험하도록 그분에 대해 알기 위해서 필요한 지식에 이르게 하는 수단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저는 그리스도인 가운데 성경에 대해 많이 알고 훌륭한 일을 했지만, 그리스도를 통해 자신의 영혼을 강하게 하지 못하므로 성중독에 빠져 있는 자들을 자주 봅니다. 그들은 “마음 가운데 하나님의 선하심과 아름다우심을 진정으로 맛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하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신학적인 지식은 갖고 있을지 모르지만, 그것을 체험하지 못한 자들입니다. 그들은 지난 날의 저와 같이 마음이 공허하고 비참한 자들입니다.
성중독에 빠져 있는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기쁨을 맛보지 못하는 것은 자신의 존재에 대한 내적인 수치심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들은 이처럼 그릇된 생각의 족쇄로부터 벗어날 때 비로소 하나님의 사랑을 누리고, 정욕에 대한 강박감과 충동으로부터 자유케 됩니다.
성적 순결에 대한 하나님의 기준을 자신의 목표로 삼는다고 해서 혼자 있는 시간을 줄이거나 지원 그룹에 참여하며 책임자 그룹의 회원들과 만나고 유혹의 장애물을 제거하는 것이 필요치 않다는 의미가 아닙니다(마태복음 5:29-30). 우리에게는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해서는 안될”(로마서 13:14) 전적인 책임이 있습니다.
포르노 잡지를 버리고, TV를 보지 않거나 컴퓨터를 사용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해야 할 일입니다. 바람직한 것은 당신이 범죄에 빠질 위험성을 완전히 제거하기 위해 성적인 부도덕으로부터 멀리 떠나는 것입니다(고린도전서 6:18).
성적 범죄에 대한 외적인 행동을 멀리하는 것은 기초적인 단계에 불과합니다. 다시 말해, 그것은 시작일 뿐 목적이 아닙니다. 참다운 절제인 성적 범죄로부터의 자유는 우리가 하나님과의 첫 사랑을 회복할 때만 가능합니다.
“주께서 생명의 길로 내게 보이시리니 주의 앞에는 기쁨이 충만하고 주의 우편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시편 16:11).
“여호와의 증거를 지키고 전심으로 여호와를 구하는 자가 복이 있도다. 실로 저희는 불의를 행치 아니하고 주의 도를 행하는도다.”(시편 119:2-3).